2008. 6. 『월간조선』


[이 달에 저문 문화계의 인물] 故 李雄根 회장

고 한 줄 없이 떠난 그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이웅근 회장 (1930∼2008)

서울 출생. 경복高·서울大 경제학과 졸업. 美 미네소타大 대학원 경제학 석사, 서울大 대학원 경제학 박사, 서울大 행정대학원 교수, 국무총리 비서관, 산업능률본부 이사장, 공인회계사회 회장, 한국공기업학회 회장, 국제종합기계 회장, 서울시스템 사장, 조선왕조실록 CD롬 간행위원회 위원, 동방미디어 회장 역임. 「한글발전유공 화관문화훈장」, 「은관문화훈장」 수훈.

 

金炫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

1959년 서울 출생. 고려大 철학과·同 대학원 철학과 졸업(박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시스템공학연구소 데이터베이스연구실장, 서울시스템(주) 한국학데이터베이스 연구소장,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정보시스템 부장. 現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문정보학 교수 및 한국학 정보센터 소장. 「조선왕조실록 CD롬」 개발사업 총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편찬 사업 수행. 논문 「한국학과 정보기술의 학제적 교육 프로그램 개발에 관한 연구」, 「고문헌 자료 XML 전자문서 편찬 기술에 관한 연구」 등.


   “조선왕조실록 CD로 만든 ‘이웅근’ 이름 잊지말자.” 지난 5월 3일 동아일보의 이광표 기자가 고 이웅근 박사를 추모하며 쓴 기사의 제목이다. 신문에 부고 한 줄 내지 않고 장례가 치뤄질 정도로 쓸쓸이 돌아가신 분. 그래도 그가 한 일을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고마왔다. ‘이웅근’ 우리가 그를 잊지 않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웅근의 이력은 무척이나 다채롭다. 그는 20대 후반인 1960년에 서울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고, 모교에서 처음으로 경제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공인회계사회 회장, 외자도입 심의위원, 공기업연구소 이사장 등 공직 경력도 화려하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계획된 길을 순탄하게 걸어간 것이 아니었다. 유신 시절 경제 전문가로서 시국 강연 강사 등으로 정부의 부림을 받던 그는 1980년 신군부 정권의 출범과 더불어 국보위(國保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위원 직을 제안받는다. 본인도 고민이 되었지만 주변의 만류가 극심하였다. 그 제안을 거절하면서 교수직도 사퇴하였다.

  기업인 이웅근의 새로운 이력은 그가 국제그룹의 임원으로 들어가면서 시작되었다. 이곳에서 그룹 종합조정실장 겸 국제종합기계 회장으로서 추진력 있는 CEO의 역량을 발휘하였지만 정부와 갈등 관계에 있던 재벌 기업에서 그의 운신의 폭은 넓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미련없이 자리를 떠난 그는 자신의 회사를 만들었다.

  1985년에 설립된 밴쳐 기업 서울시스템은 소규모의 단명한 조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한국의 기술문화사에서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는 족적을 남긴 회사이다. 서울시스템의 창업 아이템은 컴퓨터를 이용하여 책을 만들어 내는 이른 바 ‘전자출판’이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이 기술은 80년대 중반인 당시까지 초보적인 걸음마 단계에 있었다. 서울시스템은 활자조판 또는 사진식자 방식에 의존하던 프리프레싱(인쇄 전 단계의 조판 작업) 업무를 그 시절 새로 보급되기 시작한 16 비트 컴퓨터 상에서 수행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였다. 처음에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관망하던 충무로의 인쇄출판 사업자들이 급기야 서울시스템 앞에 줄을 서기 시작하였고, ‘세종’이라는 이름의 전자출판시스템은 우리나라의 출판 시장을 급속히 재편하였다.

  이웅근 회장의 인생 진로를 두 번씩이나 바꾸게 한 신군부 정권은 그에게 재운을 안겨 주기도 하였다. 이른바 언론통폐합. 언론사들을 통합하여 수를 줄이면서, 지방 신문사에 대해서도 1도1사의 지침을 세워 도별로 1종의 일간지가 간행되도록 하였다. 잔존하게 된 신문사는 독점적인 시장을 확보할 수 있었고 시설 투자의 여유가 생겼다. 신문사들도 종래의 활자 조판 체제를 전자적인 방식으로 바꾸는 데 눈을 돌렸다. 일반 도서와 신문의 전산 제작이 기술적으로 크게 차이 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문 조판의 경우, 기자의 기사 작성에서부터 신문 인쇄까지 시간 단축이 중요하기 때문에 자동화된 일관 공정이 마련되어야 한다. 또한 신문 제작은 신문사마다 자기 지면을 차별화 할 수 있는 서체를 요구한다는 특수성이 있었다. 서울시스템은 네트워크 기반으로 신문 제작의 전공정을 전산화 하는 기술과 다양한 종류의 한글․한자 서체를 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하였고, 이것은 우리나라 언론사에 새로운 획을 긋는 성과로 이어졌다.

  스스로 평생 동안 컴퓨터를 만져 본 적이 없다고 이야기 하던 이웅근 회장이 IT 분야의 밴쳐 기업을 성공적으로 출범시킬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것을 낙관적으로 수용하는 개방적 사고와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인재에 대한 과감한 투자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 우리나라의 컴퓨터 관련 기술은 보수적인 명문 대학보다도 후발 주자인 신설 대학에서 더 활발히 연구되고 있었다. 이웅근 회장은 광운대학교, 아주대학교의 컴퓨터과학 실험실을 전폭적으로 후원하며, 그곳의 유능한 인재들을 입도선매하였다.

  우리나라의 출판 역사에 남겨져야 할 많은 업적이 이웅근 회장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졌지만, 그가 말년에 이르도록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한 것은 ‘조선왕조실록 CD롬’을 간행한 사실이다.

  이웅근 회장과 조선왕조실록의 인연은 나와의 조우에서 비롯되었다. 1991년 초, 당시 한국과학기술원(KIST) 시스템공학연구소의 데이터베이스연구실장으로 있던 나는 단국대학교로부터 세미나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곳의 동양학연구소에서는 세계 최대 규모의 한문대사전의 편찬 사업을 진행 중에 있었는데, 그 사전을 컴퓨터로 제작하는 방법을 기술 업체와 협의하는 자리였다. 동양학연구소의 좁은 회의실에는 사전 편찬에 참여하는 한학자들과 전산 제작 용역을 맡기로 한 서울시스템의 기술진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한자사전 제작이라고 하는 공동의 관심사가 있기는 하였지만 배경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 하는 회의이고 보니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 나는 한문 지식을 정보화 하는 데 필요한 몇 가지 요건을 언급하고, 다음 일정 때문에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아무 말 없이 회의석 끝에 자리하고 있던 이웅근 회장의 존재를 그 날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였다.

  며칠 후 나는 ‘서울시스템 대표 이웅근’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자문을 받고 싶다고 했다. 그로부터 약 1년간 한 달에 한 번 꼴로 그를 만나 한자 코드 시스템과 한문 정보의 데이터베이스화 방안에 대해 기술적인 의견을 전달하였다. 그때마다 그는 자신의 승용차를 나아게 보내왔고, 기술진과의 미팅 때에도 빠짐없이 배석하였다.

  1년 후 나의 자문에 따라 서울시스템은 한문대사전 편찬을 위한 한자 처리 시스템의 개발을 완료하였다. 이웅근 회장은 나에게 이것 가지고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조선왕조실록을 전산화할 수 있습니다.” 나의 답변에는 긴 설명이 필요치 않았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한국철학을 전공하고, 학창시절의 가장 많은 부분을 한문 공부에 할애 했던 내가 주위의 이상한 시선을 받으며 KIST에 들어가 정보 기술 개발에 몰입한 이유는 ‘옛 문헌과의 싸움’이라고 해야 할 전통시대 연구를 더 이상 모든 자료를 손으로 찾아 가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수행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컴퓨터라고 하는 정보 기기를 고전 연구에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고자 한 것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은 그 때 내가 구상하였던 고전 정보화의 1순위 대상이었다.

  1992년 가을, 서울시스템에 데이터베이스연구실이라는 이름의 조직이 생겼다. 이웅근 회장이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받고, KIST 시절 동료로 일했던 두 사람의 탁월한 정보 기술자를 스카웃하여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고전 정보화 프로젝트의 첫발을 내딛었다. 약 6개월 동안 평창동 서울시스템 회장실 옆의 3평짜리 방에서 세 사람은 매일 머리를 맞대고 한자 사용의 제약을 받지 않는 텍스트 정보 데이터베이스와 검색 시스템을 개발하였다.

  조선왕조실록 데이터베이스의 기본 설계가 이루어졌을 때 나는 A4 용지 2매의 브리핑용 사업계획서를 이웅근 회장에서 전달하였다. 이웅근 회장은 말보다 행동이 빠른 사람이다. 계획서를 손에 쥐자 마자 인맥이 닿는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의 제안은 간단했다. “투자는 모두 내가 한다. 관계 기관이 협조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

  조선왕조실록 CD-ROM은 서울시스템과 3개의 공공기관, 국역기관인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분류사 작업을 수행한 국사편찬위원회의 협력의 산물이다. 그러나 사업 수행 초기 단계에서 소관 부처도 다른 이들 공공기관의 동의를 얻어내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당시는 정보화에 대한 인식이 요즘처럼 일반화되었던 시절이 아니다. 관련 기관들이 의아해 하고 있는 사이 이웅근 회장은 이 일을 부처 차원에서 ‘하기로 한 일’로 만들어 버렸다. 문화부나 교육부 입장에서는 볼 때에는 정부 재원의 투입 없이 그 성과를 약속받는 일이기 때문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데이터베이스 편찬 사업은 1993년 여름부터 본격화되었다. 서울시스템의 주력 사업인 전자출판 부문의 개발자들도 이 프로젝트에 합류하여 데이터 편집 프로그램의 개발과, 실록에서 요구하는 새로운 서체 제작을 수행하였다. 데이터의 분류, 입력과 편집, 교정 단계에서는 400여 명의 인력이 동시에 투여되었고, 데이터 검증을 위해 출력한 교정지의 매수는 A4 용지 100만 매에 달하였다.

  단행본 413권의 분량의 텍스트와 전문 검색 색인, 운영 프로그램과 디지털 서체를 포함한 『국역 조선왕조실록』 데이터베이스 CD-ROM의 초판은 1995년 10월에 첫 선을 보였고, 32만 개의 기사에 대한 분류 색인을 부가한 개정판의 간행은 그로부터 2년 후에 이루어졌으며, 번역 작업까지 수반한 『고종․순종실록』 CD-ROM은 1998년 봄에 완성되었다. 조선왕조실록 한문 원문에 현대적인 표점을 부가하고, 본문 중의 모든 인명, 지명, 서명, 연호 등을 전자적으로 식별할 수 있게 한 『한문 원전 조선왕조실록』은 이웅근 회장이 서울시스템을 떠난 이후 2002년에 완성되었지만, 그 편찬 사업의 대부분은 이 회장 시절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조선왕조실록 CD-ROM의 간행이 학술 진흥면에서 거둔 성과는 우리 사회에서 널리 인식되고 있기 때문에 이 지면에서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의의 한 가지를 지적한다면, 그것이 조선시대 역사에 대한 지식을  가깝게는 인접 학문의 종사자에서부터 더 넓게는 작가, 언론인, 일반인까지 우리의 역사에 대한 지식 수요자들에게 폭넓게 제공하는 데 기여하였다는 점이다.  조선왕조실록 CD-ROM의 최대 수혜자는 교양 서적 저술가와  TV 방송 프로그램 제작자,  연극 극작가 등이었다.  ‘학술'과 '창작' 사이에 놓였던 지식 소통의 장벽을  해소한 것이다. 이것을 통해 문화콘텐츠 산업 관계 종사자들이 학자들을 통한 인적 매개 없이 창작의 소재에 바로 접근할 수 있게 되었고, 풍부한 소재를 자유롭고 다양하게 응용할 수 있게 되었다.  TV 드라마 ‘대장금’과 영화 ‘왕의 남자’가 성공을 이룬 배경에는 조선왕조실록 CD-ROM에 기인한 역사 지식의 대중화가  있었다고 하는 것은 이미 공론화된 사실이다.  조선왕조실록 CD-ROM의 데이터와 검색 프로그램을 그대로 인터넷에 옮겨 놓은 e-실록이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 상에서 오픈되었을 때, 언론은 그 의의를 이렇게 평가하였다.    “e-실록은 역사학자의 실록 독점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조선일보,  2006. 1. 28)

 

「조선왕조실록 CD롬」을 바탕으로 저술된 교양역사서들.

   

  조선왕조실록 CD-ROM의 간행은 이렇듯 의미있는 일이었지만, 그 역사의 주역 이웅근 회장의 말년은 불운하였다.  10여간 그가 키워온 문화 기술 기업 서울시스템이 1997년 IMF의 직격탄을 맞아 쓰러진 것이다. 혹자는 당시 서울시스템의 부도가 조선왕조실록 CD-ROM 간행 적자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그것이 주된 이유는 아니다. 이웅근 회장의 실록 프로젝트는 수익성을 기대하고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기업인이기 때문에 투자와 회수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투자 쪽이 더 크리라는 것은 그도 처음부터 예상한 일이었다. 그에게 있어 실록 프로젝트는 학자 출신 기업인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을 확립하고, 회사의 사회적 이미지를 제고하는 브랜드 메이킹 사업이었고, 그런 점에서 그가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거두었다고도 할 수 있다. 회사 부도의 실제 원인은  신문 전산 제작 시스템의 매출이 순식간에 소멸한 것이었다.  그 시절 우리 사회에 몰아닥친 유동성 위기는 기업 활동 전반을 위축시켰고, 그것은 곧바로 광고시장 침체로 이어졌다. 광고 수입이 줄어든 신문사들은 시설 투자를 중단하였고, 서울시스템의 주력 시장은 위축 정도가 아니라 일정 기간 동안 아예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국역 조선왕조실록 CD-ROM 간행을 마무리지은 후, 미국 하버드 대학에 방문 교수로 나가 있던 나는 그곳에서 IMF의 충격과 서울시스템의 위기설을 한꺼번에 접하였다. 걱정이 되어서 이웅근 회장에게 전화를 할 때마다 그는 희망적인 언사로 오히려 나를 격려하였다.  “너무 걱정 말아요. 여러 가지 대안이 있으니까 곧 회복될거야.”  하지만 그의 이러한 낙관적인 자세가 사태 수습의 타이밍을 놓치게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감원 등 극단적인 조치가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도의 순간까지 그것을 실행하지 못했던 것이다.

   부도 이후  이 회장은 서울시스템을 떠나게 되었지만, 그는 한 번 더 재기의 기회를 맞이하였다. IMF 후에 다시 일었던  IT 산업 붐은  서울시스템을 정상화시켰고, 그로 인해 비록 경영권은 내주었지만 일정량의 회사 주식을 가지고 있던 그가 자기 투자분의 일부를 회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회장에게 사회적으로 충분한 기여를 하셨으니, 휴식 기간을 가지고 사업에 대한 미련은 접으시라는 권유를 하였다.  그러나 넘치는 에너지 때문에 잠시도 쉴 수 없는 그는  남은 재산마저 올인하며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 회장은 동방미디어라는 회사를 세워  조선왕조실록 CD-ROM 류의 지식 문화 콘텐츠를 생산하는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구 정신문화연구원)의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디지털화 하고 CD-ROM으로 보급한 것은 그가 동방미디어 시절 수행한 일이다. 동방미디어는 『고려사』, 『삼국사기』 등 역사서와 『사상계』, 『창착과 비평』등의 문예지 등 수 백 종의 학술, 교육, 문화 분야의 디지털 콘텐츠를 제작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콘텐츠 산업은 현재까지도 엔터테인먼트 쪽으로 편향되어 성장할 뿐 이웅근 회장이 관심을 두는 학구적인 지식 콘텐츠 분야는 수익성 있는 시장을 열어 주지 않았다.  코스닥 진출을 위해 시도한 무리한 상장사 인수는 다시 한 번 그의 발목을 잡았고,  이웅근 회장은 또 다시 사업을 접게 되었다.

   재산 한 푼 남지 않은 채 수년 간 암과 투병한 말년, 그리고 부고 한 장 내지 않고 치뤄진  쓸쓸한  장례만을 본다면 이웅근 회장이 과연 성공적인 삶을 살았는가에 회의가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를 기억하고자 하는 이유는 그가 우리 사회에 남긴 것이 결코 작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남긴 것은  디지털 조선왕조실록이나 온라인 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은 지식정보화사업의 성과만이 아니다.  아무도 그러한 것이 미래의 사회에 어떠한 역할을 하고 어떠한 가치를 지니리라고 하는 것을 예견하지 못하던 시절, 그는 새로운 비전과 희망을 가지고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그 미래의 가치에 투입하였다. 

   마치 컬럼버스의 달걀처럼, 이웅근 회장이 과거에 어렵게 해 온 일들이 오늘날에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회장과 같은 이의 선구적인 노력과 기여가 없었다면  오늘날 인터넷의 세계에 우리의 전통적인 지식 정보가 넘쳐나는 이같은 결과를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 될 지, 나에게 무엇을 줄 지  분명하지 않아도, 우리 사회는 변화하고 있고  그 변화에 부응하는 일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데 주저하지 않는 자세.  이것은 17년간 그의 옆에서 내가 보아 온 이웅근 회장의  모습이며,  내가 그를 오래도록 기억하고자 하는 이유이다.